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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시작, 그 의미와 3대 화가

by 피렌체가든 2022. 6. 24.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들었던 단어가 바로 '르네상스'였습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 중 배웠던 어슴푸레했던 몇 단어들로는 현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아쉬움이 많았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히 투어 가이드가 세세히 설명해주었기에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그나마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탈리아라는 나라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르네상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르네상스(Renaissance)의 시작

 

르네상스는 14세기~16세기 사이에 일어난 문화 운동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예술이나 학문&지식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움직임

 

 

 

봉건적인 제도가 팽배하고 강력한 신(神) 중심의 사상으로 인해 개인의 창조성을 억압하는 분위기가 심했기 때문에, 문화가 꽃을 피워 절정을 이루던 고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 고전 학문의 가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이에 따라 문화,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과학 등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이 인쇄술이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지식이 확장되게 시작됩니다. 봉건제 몰락하고, 상업의 성장, 항해술과 화약과 같은 신기술 발명이 이루어졌으며, 신대륙의 발견, 지동설의 등장 또한 이 시기에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 정신의 시작은 인문주의 운동이었으며, 처음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열매를 맺은 후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쳐 '서양 문화의 어머니'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미술 분야에서 그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었으며 1527년 로마의 몰락으로 끝이 났지만,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그 정신을 이어 꾸준히 탄생했습니다. 

 

 

 

 


 

2. 르네상스의 의미와 근본정신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부활, 재생을 의미.

근본정신은 인문주의, 즉 휴머니즘(Humanism)에서 시작.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을 뜻하는 후마니오라(Humaniora)에서 시작된 말로, 인간의 창조성, 인간이 지니는 고유의 가치 모든 것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표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철학자과 과학자들이 모여있는 그림. 인문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의 기본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

 

 

 당시 중세는 600년 이상 '신(神, God)'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했던 사회였기 때문에,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존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표현될 수조차 없었습니다.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회에 안정된 기틀을 제공하는데 실패했으며, 낡은 봉건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때였는데, 단테를 시작으로 보카치오, 페트라르카 등 이탈리아의 문학가들이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하여, 다시 인간 본연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선구자인 단테,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지아노초 마네티,콜루치오 살루타티,  마르실리오 피치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로렌초 발라, 레오나르도 브루니 등이 더욱 그 정신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인문주의는 종교 교리에서 벗어나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의 확장을 도와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력을 키웠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탈리아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바로 '미술' 분야로, 예술가들은 자연을 연구하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아름다음을 표현하고 정확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휴머니즘 사상은 영국, 프랑스,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어 발전하였으며, 18세기에는 루소, 몽테스키외, 괴테, 19세기에는 톨스토이, 니체 등 많은 문학가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휴머니즘은 종교, 인종, 국가을 모두 초월하여 인간 자체를 존중하는 정신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소중한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3. 르네상스 3대 화가 :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수많은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 문학가를 남겼지만, 르네상스를 관통하는 대표 인물들이 있습니다. 한 세기에 천재가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세상에서 동시대에 3명이 활동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수많은 작품과 업적을 남긴 3대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 ~ 1519년)

주요 작품 :  <모나리나>  <최후의 만찬>  <해부도>

 

천재로도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미술가이자 과학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 과학, 수학, 음악,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내며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그림, 음악,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후에 부친의 친구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 미술 수업을 받은 그는, 이곳에서 회화, 조각 등 여러 분야에서 훈련을 받으며 자연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서른 살에는 더 큰 도시인 밀라노에서 밀라노 대공의 후원으로 17년간 머물면서 건축, 조각, 그림, 군사기술, 도시계획,  무대 설계, 행사 기획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합니다. 당시 밀라노는 베네치아와 전쟁 중이었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군사 기술 담당자이자 건축가로 임명되어 무기를 설계하고 요새를 만들거나 도시 계획을 설계하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많은 작품 중 가장 손꼽는 것이 바로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성당에 그리기 시작해 완성한 대작이 바로 <최후의 만찬(1495~1497 제작)>입니다. 다빈치 최고의 작품이자 서양 미술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최후의 만찬은, 예수를 둘러싼 열두 명의 제자를 소재로 하였으며, 예수의 머리를 소실점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작품으로 현재까지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중 예수에게 누가 배신할 것인지 묻는 장면을 그렸는데, 다빈치는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게 했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은 구성과 빛, 투시법과 원근법을 활용하여 회화의 법칙과 질서를 학문적으로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를 한 사람으로도 유명한데, 생애 후기에는 그림보다 과학에 관심을 더 쏟아 인체를 해부하고 신체기관을 연구했으며, 물의 성질을 연구하거나 새의 비행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신체 구조와 두뇌를 연구하여 인간의 행동과 기억, 상상, 인식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영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대상을 꼼꼼히 관찰하고 비례를 따지며, 세밀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과학-예술' 이론을 정립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가 스케치북에 남긴 인체 비례, 눈동자, 태아 등의 수많은 드로잉과 글, 인체 해부도는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75 ~ 1564년)

주요 작품 : <피에타> <다비드상>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대표적인 조각가이자 화가입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던 그는, 석공이었던 유모의 남편 작업장을 드나들며 돌이 어떤 형상으로 바뀌는지 즐겨보곤 했습니다. 몰락한 귀족 출신이자 가난한 마을 행정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학업에 열중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를 원했지만, 그림에만 관심이 있던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합니다. 매질을 해서라도 막아보려 했던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손을 이끌고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가이자 금세공업자였던 기를란다요의 공방으로 찾아갔습니다. 열세 살부터 그림을 배운 그는 금세 스승도 질투할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1년 만에 공방을 떠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은 지 일 년여 만에 조각을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 생각하며 몰두하게 되면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공이 산마르코 성당 정원에 세운 조각 학교에 입학합니다. 이곳에서 로렌초 메디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조각과 인체 해부에 전념, 신화와 성서 등 고전을 읽으며 교양을 쌓고, 메디치 가문이 모아놓은 조각들도 접하며 그 아름다움에 크게 고무되었다고 합니다. 주로 피렌체와 로마가 주 활동 무대였는데, 스물다섯의 나이에 로마에서 <피에타>를 완성시키며 세간의 주목과 환호를 자아냅니다. 그 후 피렌체로 돌아와 40년간 방치되었던 대리석으로 <다비드상>을 만들어 다시 한번 큰 주목을 받습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벽화를 의뢰받습니다. 그는 라파엘로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거나, '나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한사코 거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508년 여부터 4년 여에 걸쳐 진행된 작업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라는 대작을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 돔 설계, 파르네제 가문의 저택과 파올리나 예배당,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이어진지는 계단을 설계하는 등,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각, 회화뿐만 아니라 시집까지 출간하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 라파엘로 산치오 (1483 ~ 1520년)

주요 작품 : <아테나 학당>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전성기 시대 3대 거장 중 하나인 라파엘로는 다른 두 사람의 장점을  고루 갖춘 예술가로서 살아 있는 동안 최고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궁정화가였던 아버지 조반니 산티에게서 처음 그림을 배우고, 문화의 중심지였던 우르비노에서 어른 시절을 보내며 문화적 혜택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성장하며 이루어진 성품까지 더해져 라파엘로는 높은 지위에 쉽게 올랐다고 합니다. 라파엘로가 어릴 때 아버지 산티가 돌아가셨는데,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나 피렌체로 건너갑니다.

 

당시 피렌체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한참 활약하고 있었는데,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지식을,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부터는 빛의 사용, 피라미드 구조와 부드러운 색조 변화를 이용해 형태에 입체감을 주는 '스푸마토 기법' 등을 익히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의 업적을 연구하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이를 통해 라파엘로는 고요하고 평온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작품을 창안하게 되었고, 미켈란젤로의 라이벌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4년 뒤에는 로마로 향해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며 그의 생애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아테나 학당> <감옥에서 구출되는 성 베드로> 등의 대표작들은 그 시절 교황의 거처를 꾸미는 벽화로 그린 것들입니다. 특히 <아테나 학당>(1510~1512)은 이야기와 구성을 최상으로 구사할 줄 알았던 그의 재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라파엘로는 당시 매우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장 화려한 장례식이 치러진 후 판테온에 묻혔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초상화는 섬세한 색조와 고요한 분위기가 특징으로 훗날 렘브란트, 티치아노 등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상으로 르네상스의 의미와 3대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동시대에 위대한 천재가 3명이나 실존했다는 것도 놀랍고, 현재 남아있는 그들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파고 파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샘솟는 것 같습니다. 음에도 재미있는 세계사, 이탈리아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또 만나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