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피렌체의 메디치가문 : 르네상스 예술의 꽃을 피우다

by 피렌체가든 2022. 7. 25.

 

저번 시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로마의 주요 관광지, 르네상스와 3대 화가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링크 첨부)

 

 

 

2022.05.16 - [분류 전체보기] - 찬란한 문화유산이 꽃 핀 이탈리아의 모든 것

 

찬란한 문화유산이 꽃 핀 이탈리아의 모든 것

 제가 이탈리아에 빠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문화 유산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이 너도 나도 유럽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왜 다 유럽

firenzegarden.tistory.com

 

2022.05.23 - [분류 전체보기] - 이탈리아 로마, 꼭 가야 할 관광지 10곳 알아보기

 

이탈리아 로마, 꼭 가야 할 관광지 10곳 알아보기

안녕하세요. 피렌체가든입니다 : ) 이제 점점 날씨도 풀리고, 코로나 규제도 완화되면서 해외여행을 많이 계획하시는 것 같아요. 해외여행 뽐뿌가 오니, 저도 이탈리아를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firenzegarden.tistory.com

2022.06.24 - [분류 전체보기] - 르네상스의 시작, 그 의미와 3대 화가

 

르네상스의 시작, 그 의미와 3대 화가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들었던 단어가 바로 '르네상스'였습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 중 배웠던 어슴푸레했던 몇 단어들로는 현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아쉬움이 많았던

firenzegarden.tistory.com

 

 

 

오늘은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었고, 현재까지 그 유물과 유산으로 세계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한 이유, 그 중심에 있는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Follow me!

 

 


 

Medici Family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 시작하여 막대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

동시대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문화예술분야 후원 및 부흥을 위해 애썼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자 상징
이미지 출처 : 다음 나무위키

 

 

 

1. 메디치 가문의 시작

 

 

이탈리아의 상업도시인 피렌체, 인구 30여만 여명에 불과하고 수도도 아닌 이 도시를 세계적인 예술의 집합소로 만든데 가장 일조한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메디치 가문'입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평범한 부유층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평범한 가문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전 세계적인 가문으로 성장하고 지금까지 명성을 남기게 된 이유가 있는데요. 바로 가문의 상업적, 정치적 분야뿐만 아니라, 종교와 학문적인 것에까지 그 영향력이 깊이 관여되었을 뿐 아니라 유례가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으로 당시 예술가들을 파격적으로 지원하여 결국에는 르네상스가 꽃피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면 때문입니다. 피렌체를 중심으로 성장한 메디치 가문으로 인해 피렌체 또한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 그 후광에 힘입어 관광객을 대상으로 경제적인 보상을 얻고 있습니다.

 

 

 

'메디치(Medici)'는 이탈리어로 '의사'를 의미하는 '메디코(medico)'의 복수형인데, 이들 조상이 의사나 약제사, 염료를 다루는 상인 등의 직업을 가지고 그로부터 가문의 명칭이 비롯되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에서는 '코시모(cosimo)'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역시 의사와 약제사의 수호성인인 '성 코스마스(Saints Cosmas)'과 연관되어 지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 메디치 가문의 성장

 

 

메디치 가문은 1230년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역사에서도 13세기 이후 피린체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하에 가까운 상업도시인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 신흥 상인들이 연합해 일으킨 '촘피의 난(Tumulto dei Ciompi)'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이 시기에 은행업에 진출한 메디치 가문의 비에리는 로마 교황청과 연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부를 쌓기 시작합니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때에 이르러 피렌체를 지배하는 대형 가문으로 세력이 커지게 됩니다. 조반니는 메디치 은행(Banco dei Medici)을 설립했으며, 교황을 지원해 로마 교황청의 재무관리자가 될 뿐만 아니라, 피렌체의 행정정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조반니의 아들인 코시모(Cosimo di Giovanii de' Medici, 1389~1464)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권을 더욱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도시뿐만 아니라 런던, 아비뇽 등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도 은행 지점을 확대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아울러 당시 활동하던 예술가(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도나텔로 등)를 후원하며,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어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등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피에로(Piero di Cosimo de' Medici,1416~1469)도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도나텔로, 필리포 리피, 베노초 고촐리, 산드로 보티첼리 등), 수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보급에도 앞장서 문예 부흥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황금기는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Lorenzo de' Medici, 1449~1492) 때에 절정을 이르렀습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였으며, 당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와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최절정으로 이끈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라고 불리기까지 한 그는 시를 쓰기도 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Whoever wants to be happy, let him be so:

 about tomorrow there's no knowing.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들이여, 행복을 즐겨라:

 내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피에로(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1~1503)'는 1494년 프랑스군이 쳐들어왔을 때 무능하게 대처해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메디치 은행도 파산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크게 쇠퇴하였으나, 1512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변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몰아내자, 피에로의 동생인 조반니는 교황 군을 이끌고 피렌체를 장악해 지배권을 다시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조반니는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은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그의 사촌동생인 줄리오도 교황(클레멘스 7세)이 되면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뿐만 아니라 교황령으로도 지배권을 확장하였습니다.

 

 

그 후 피렌체에서의 지배권을 잃고 소유하는 일들을 여러 번 겼다가 결정적으로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경제적 중심지가 옮겨간 것과 맞물려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본가의 경우 남계 혈통은 끊겼으나, 분가인 오타이아노 메디치 가문은 오늘날에도 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동상

 

 

약 300년간에 걸쳐 피렌체와 고향인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렸고, 교황 4명을 배출했으며 프랑스 왕비 둘을 포함해 수많은 유럽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최고의 권력 가문으로 자리 잡은 메디치 가문! 최고임에도 불구하고 으스대며 군림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가치를 인정하며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한 점은 역사의 빛나는 한 면을 장식하기에 충분합니다. 

 

 

메치디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얻게 된 엄청난 양의 예술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로렌초의 후손이자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예술품을 토스카나 대공국과 피렌체에 기증하고,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의 유언을 남겼고, 그 결과 오늘날 피렌체는 수많은 관광객이 사랑하고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기증된 예술품들은 오늘날 피렌체의 대표적 관광지인 '우피치 미술관'에서 대부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물학적인 수명이 끝난 후에도,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피렌체에 막대한 경제적 문화적 자산을 선물로 남겨준 메디치 가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